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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이렇게 넓은 마음으로 아이를 받아줄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조금 답답해진다. 마음 한 구석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올라온다. 그렇게 아이 뜻을 다 받아줘서야 도대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겠어? 부모가 원칙을 지켜야지 제멋대로인 아이로 만들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 시대의 아이 키우기에도 여전히 사랑보다는 요구가, 수용보다는 지시가 몇 배 더 많다. 그림책들조차, 예쁜 그림과 부드러운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좋은 아이가 되라는 요구는 이 시대의 대세다. 이런 대세 속에서 가브리엘 뱅상은 작은 목소리로, 소박한 그림으로 그저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여기 사랑받기에 행복한 아이가 있다고.





뱅상의 셀레스틴느 연작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셀레스틴이란 아기 생쥐와 에르네스트란 어른 곰. 그는 굳이 아빠 생쥐, 또는 아기 곰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사랑이란, 또는 가족이란 굳이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사랑은 그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마음이다.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꼭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마음이다.


비오는 날의 소풍은 흔한 징크스를 다룬다. 소풍을 가기로 한 날 마침 비가 온다. 기대가 무너진 아이는 속상하다. 상황도 어쩔 수 없지만 속상한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삐쳐있으면 부모 마음도 편하지 않다. 그래서 한소리 하기 쉽다. 상황이 이런 것을 어떻게 하냐, 엄마보고 어쩌라는 거냐, 당장 뚝 그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다르다. 좋은 생각이 있다며 셀레스틴을 부른다. “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을 가면 어떨까?” 까짓 살면서 비 좀 맞으면 어떻단 말인가? 감기가 들까봐? 감기 한번 들면 무슨 인생에 금이라도 가는가? 아이의 마음을 들어주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그 길을 걸었기에 힘든 일이 생기면 같이 겪어주는 부모. 아이가 바라는 부모는 그런 부모이다.





시메옹을 찾아주세요에서의 에르네스트 역시 일반적인 어른들과는 다르다. 눈이 온 날 길에서 펭귄 인형을 잃어버린 셀레스틴. 에르네스트는 아이를 위해 밤에 혼자 나가 인형을 찾아본다. 안타깝게도 눈밭에서 발견한 인형은 망가져 있다. 망가진 인형에 실망할까봐 에르네스트는 다른 인형들을 여럿 사서 가져온다. 그러나 아이는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메옹처럼 펭귄이 아니니까. 아이들은 흔히 그렇다. 그냥 다 인형이 아니냐 싶은데 그렇지 않다. 비록 인형이지만 내 마음을 주고 나와 시간을 함께 한 그 인형이 필요하다. 


에르네스트는 실망한 아이를 어떻게 달랠까 고민한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펭귄 인형을 만든다. 비록 예전의 시메옹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성과 시간이 들어간 인형은 소중하니까. 그리곤 주인을 못 찾은 여러 인형들을 위해 파티를 연다. 아이 친구들을 불러 하나씩 선사한다. 인형들에게도 자신을 사랑해줄 주인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어른, 그런 부모. 그리고 그런 부모에게 진심으로 의지하는 아이, 의지하기에 자발적으로 부모를 도우려는 아이가 뱅상의 그림책의 주인공들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다시 돌아봐진다. 내가 나의 아이에게 주고 있다는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들은 뱅상의 그림책을 보면서 따뜻함을 느낀다. 행복하다. 현실은 늘 어려움이 있다. 기대에 못 미친다.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자기편이 되어주는 부모이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내는 믿음직한 부모이다. 넓은 집과 휴양지, 신나는 게임기, 폼 나는 옷을 바라는 것 같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다. 멋지고 비싸면 스스로가 강해 보이니 갖고 싶을 뿐, 아이가 바라는 것은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줄 든든하고 따뜻한 가슴이다. 자기를 휘두르지 않고, 자기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다. 무릎을 꿇어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주는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에겐 절실하다.


셀레스틴느 연작이 부모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더 크다면 곰 인형의 행복은 아이들의 마음에 직접 다가가는 그림책이다. 낡고 버려진 곰 인형을 고치는 할아버지가 이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아이들 역시 처음에는 곰 인형을 사랑하고 자주 껴안아 주지만 싫증이 나면 금방 내버린다. 그게 곰 인형의 삶이다.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지만 받은 것은 버려짐이다.





이런 낡고 망가진 채 버려진 곰 인형이 할아버지에겐 더 없이 소중하다. 할아버지는 곰인형 하나 하나를 보살펴준다. 터진 부분은 꿰메주고, 낡은 부분은 덧대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다는 사실. 곰 인형이 말하듯 아픈 건 귀가 아니라 마음이다. 너희들이 쓸모없고 낡은 것이 아니라 모두 여전히 소중하다고 말해준다. 너가 어떻든 널 버리지 않을 것이라 말해준다. 돈을 준다고 해도 너희들을 팔지는 않을 거야. 네가 어떻든 너는 내게 한없이 소중해할아버지는 곰인형을 그런 마음으로 대한다. 이런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 자존감의 근원이다.


그림책을 넘기며 아이들도 느낀다. '나에게도 사랑이 필요하구나. 사랑만 달라고 할 일이 아니구나. 내게도 주어야 할 사랑이 있구나.' 사랑은 빛나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니다. 약한 것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한결같이 내 마음을 지켜가는 행위이다. 뱅상은 사랑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꾸짖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랑에 아이도, 부모도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기에 이 그림책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책이다.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격주로 실리는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4월 28일 자에 실린 칼럼의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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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


아이들은 귀엽다. 특히 잠잘 때 그렇다. 솔직히 잠잘 때만 겨우 귀여운 경우도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처음부터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겠다고 마음먹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이에게 함부로 하는 부모조차 다른 사람이 자기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면 그냥 참고 넘어가지 못한다. 어찌 보면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가장 심한 말을 하고, 사랑하기에 서로 상처를 준다.


부모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주 단순한 진실이 있다
. 아이들은 말을 안 듣기 마련이라는 것. 옳고 그름도 모르고, 길게 바라보고 생각할 줄도 모르지만 아이도 한 인간인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 부모는 말을 안 듣기 마련인 아이를 상처를 최소화하며 끌고 갈 의무가 있다. 그러니 어렵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부모에겐 압박감이 있다. 나쁜 것은 빨리 고쳐주고 싶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내 자식이 아니라면 생길 여유가 내 아이 앞에선 사라진다. 사랑하기 때문이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부모는 소리를 지른다. 너무나 유명한 안돼, 데이빗시리즈를 보며 말썽장이 아이도 부모도 함께 위안을 받는다. 아이는 야단치고 벌세우는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라는 확인을 해서 안심을 한다. 엄마 역시 그림책에서 장난치다 야단맞고, 이내 울먹이며 엄마에게 안기는 데이빗을 보며 안심을 한다. ‘그래 내가 아이에게 심하게 했지만 아이는 아직 내 편일 거야. 나 말고 다른 엄마들도 다들 마찬가지구나.’


박연철의 그림책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안돼 데이빗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우리 그림책이다. 아이들에 따라서 원색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림 이해가 쉬운 데이빗 시리즈가 더 끌릴지 모른다. 박연철의 그림책은 콜라주와 스크래치를 살린 판화 기법으로 망태할아버지라는 대상이 가진 공포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첫 장부터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환상 세계가 그려지니 아이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떼를 쓰고 말을 안 들으면 쉽게 말한다
.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호랑이가 물어간다, 경찰 아저씨가 온다. 지금은 사라진 존재지만 큰 망태기를 등에 지고 다니면서 폐품들을 주워 가던 할아버지가 있던 시절에 부모님의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는 정말 두려웠다. 그게 사실일리 없다는 의문을 가질 쯤이면 부모는 힘을 잃고 아이는 조금씩 철이 든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에 빠진 아이의 환상 속 공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볼 때 모든 기준은 부모가 마음대로 정한다. 게다가 부모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판단한다. 아이도 이유가 있는데 그냥 거짓말쟁이로 몰고, 맛난 사탕을 두고 굳이 밥을 먹으라 한다. 부모들은 늦게까지 TV 보는 것 다 아는데 아이라고 내게는 일찍 자라고 성화다. 그걸 부당하다고 따지려하면 부모는 협박한다. 자꾸 그러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저항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두려움의 본질은 사랑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부모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아이는 부모를 미워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 마음엔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와 그것을 억누르는 부모에 대한 미움이 한 편에 있고 그런 미움 때문에 부모가 날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 편에 있다. 그 두려움은 아이에겐 현실적이다. 누구나 어릴 때 한번쯤은 정말로 부모가 날 주워왔을지 모른다. 언젠가 나를 두고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다.


두려움을 내면에 담아두기에 아이의 마음은 아직 너무 약하다
. 그래서 밖으로 던진다.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잔뜩 겁을 먹기도 한다. 그것이 부모를 오히려 힘들게 하지만 자기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가끔은 받게 되는 위로 역시 무관심보다는 달콤하다.


이 그림책의 묘미는 반전에 있다
. 엄마와 싸우고 잠에 들며 아이는 망태 할아버지가 두렵다. 오늘 자신이 낮에 엄마에게 대들었던 것이 생각나고 그때 엄마가 야단치며 한 말이 떠오른다. "너 자꾸 이러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두려움에 떠는 아이의 방 앞이 어두워지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너 잡으러 왔다는 망태할아버지의 호통. 그런데 놀랍게도 잡혀가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다. 엄마다. 그래 엄마가 거짓말쟁이이고, 엄마가 나쁘다. 내가 나쁜 게 아니다. 이 장면을 아이에게 읽어주며 뜨끔하지 않은 부모는 얼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안심하거나 통쾌할 수는 없다. 엄마가 잡혀가는 일은 어쩌면 더 두려운 일. 그러기에 이내 다음 장면에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 이건 모두 꿈이다. 악몽에서 깨어 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달려온다. 그리고 서로 화해한다. 내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잘못은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아이도, 그것을 막을 수밖에 없는 부모도 잘못은 아니다. 각자 입장이 다를 뿐이다. 어쩌면 망태할아버지는 아이와 부모 마음 속의 분노일지 모른다. 상대가 내 말을 안 따르기에 화가 나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사라진다 해도 전혀 통쾌하지 않다. 오히려 두렵고 불안하다. 그런 분노와 불안이 섞인 감정, 그것이 두려움이다.


아무리 부모가 미워도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적이다
. 헤어짐이 아이의 바람은 아니다. 화해가 아이의 바람이다.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조금씩 부모를 받아들이며 아이는 자란다. 그때 부모가 일방적이지 않다면 아이에겐 행운이다. 강렬한 공포심,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는 불안감 없이도 부모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망태 할아버지가 없더라도 아이는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 그 착한 아이는 물론 부모에게 편한 아이는 아닐지 모른다. 아이는 의자도 침대도 내 옷도 아니다. 편한 것이 어찌 좋은 것이겠는가?



 

못 보시는 분들이 많기에 사족을 붙여본다. 마지막 장면 흘깃 엄마의 등을 올려보는 아이의 눈. 거기에 찍힌 망태 할아버지의 착한 아이 도장. 영화 타이틀롤에 나오는 엔지 장면과 같은 박연철 작가의 유머 코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은 한겨레신문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3월 2일자 원고의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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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



눈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도, 눈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눈이 오면 금방 흥분을 한다. 여기에는 이유도 설명도 필요 없다. 아이들은 그냥 눈이 좋고, 만지고 싶고, 눈밭을 내달리길 원한다. 왜 아이들은 눈을 좋아하는 것일까?

 

흑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처음 등장시킨 작가 에즈라 잭 키츠의 눈 오는 날은 눈 그림책의 고전이다. 주인공 피터는 자고 일어나니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것을 발견한다. 눈을 밟으며 발자국을 내고, 눈옷 입은 나무를 흔들어 눈 폭탄도 맞아보고, 형들의 눈싸움을 구경한다. 눈사람도 만들고, 눈 더미에서 미끄럼도 타고, 눈을 뭉쳐 집에도 가지고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이 피터에겐 처음 하는 모험이지만 즐겁고 잊고 싶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다.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눈이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눈이 오면 피터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며 피터와 같은 소원을 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도 눈이 오기를.

 

눈은 순백이다. 눈이 오면 세상은 단순해진다. 눈으로 가려진 부분과 아직 가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나뉜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처럼,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삶이란 늘 때가 묻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남기는 법이다. 그러기에 흰색은 늘 그리운 출발점이다. 이와사키 치히로는 눈 오는 날의 생일에서 하얀 눈과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토토가 태어난 날은 눈이 왔다고 한다. 생일을 하루 앞둔 토토는 설레임이 가득하다. 그런데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작은 실수를 한다. 친구들의 놀림에 창피하여 도망친 토토는 생일도 친구도 다 싫어진다. 하지만 토토에겐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자신이 처음 태어난 그 날처럼 이번 생일에도 눈이 왔으면. 눈을 기다리는 토토의 마음은 백지 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 놀림으로 창피한 마음을 다 지우고 토토는 새로 시작하고 싶다.

 

 

눈은 새로운 출발점이다. 살아온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은 창피함을 더 못 견뎌한다. 나이를 먹은 어른들은 이미 벌어진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아이들은 종종 과거를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취소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처럼 모든 것을 덮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길, 다시 태어난 듯 모든 창피한 것은 잊을 수 있길 아이들은 바란다.


 

눈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솜처럼 가벼운 그 우아한 낙하에 있다. 천천히 흔들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면 새의 깃털처럼, 이불솜처럼 포근할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다른 것과는 달리 전혀 겁나지 않는다. 필리스 루트가 글을 쓰고 베스 크롬스가 그림을 그린 겨울 할머니는 눈에 대한 서양 민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늘에 사는 겨울 할머니는 봄, 여름을 보내는 동안 거위의 깃털을 모아 큰 깃털 이불을 만든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만들어 둔 큰 이불을 힘껏 턴다. 이불에서는 작은 가루가 떨어져 내리는데 그것이 눈이다. 거위털과 이불이 주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분명 만지면 차갑고 선뜩한 눈이지만 멀리서 볼 때는 더 없이 포근하고 따뜻해 보이는 것이 눈의 신비다.

 

 

 

눈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아이들을 꿈꾸게 한다. 잘 뭉쳐지는 눈은 다른 어떤 자연 속 소재보다 뛰어난 만들기 재료이다. 공짜인데다 가볍다. 뭉치고, 모양을 만들고, 다듬기가 쉽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눈사람도 만들 수 있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눈사람 아저씨는 눈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환상적인 그림책이다. 낮에 아이가 만든 눈사람이 밤이 되자 아이를 모험에 데리고 간다. 같이 아이 방에서 놀이를 하고 맛난 음식을 차려 먹는다. 하늘을 날며 멋진 도시를 구경시켜주고 내일 또 만나자고 헤어진다.

 

아이들은 사소한 것을 만들면서도 그 사소한 것이 죽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아이의 마음이 들어간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인다. 낮의 놀이에서 마주친 것들, 그리고 놀이 속에서 아이가 만든 것은 아이의 꿈에서 더 자유롭게 나온다. 꿈을 통해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루는데 눈은 그 꿈을 풍성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소재 중 하나이다.

 

 

이처럼 눈은 아름답기만 한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 걸음 떨어져 볼 때는 따뜻하고 포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만져보면 맨손으로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 눈밭에서의 놀이는 신나지만 몸은 바짝 얼기 십상이다. 정말 만만한 것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아이도 이것을 알아간다.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편인 듯 생각했던 친구들도 때에 따라 변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한다. 온전히 내 편인 줄 알았던 엄마조차 내 말을 안 들어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눈이기에 아이들은 도전하려 한다. 왠지 가볍고, 포근하고, 해볼 만하다 느껴지기에. 아이들에게 도전을 격려하는 부모에게 눈은 좋은 모델이 된다. 아이는 옳은 것, 좋은 것을 따라가지 않는다. 신나는 것, 매력적인 것에 용기를 낸다. 만만한 것, 도전해볼 만한 것에 끌린다. 부모부터 미리 겁먹지 말아야 한다.


 
 

달빛 비추는 눈 덮인 산과 거리 풍경이 매력적인 그림책 아기 여우와 털장갑을 보자. (구로이 켄의 그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 온다.) 엄마 여우는 사람들에 대해 잔뜩 겁을 먹고 있다. 그래서 아이에게 겁을 잔뜩 준다. 물론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겁을 준 탓에 아기 여우는 긴장감 때문에 오히려 실수를 한다. 용감한 것은 아기 여우다. 작은 실수에도 담대했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기 여우가 본 사람들의 모습은 엄마 여우의 걱정하며 말한 것과는 차이가 컸다.

 

세상은 만만치 않지만 아이들은 도전해야 한다. 차가운 겨울이지만 아이들은 뛰어 놀아야 한다. 녹아버릴 것을 알지만 아이들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시작은 조금 가벼워야 한다. 가벼운 눈처럼, 포근한 느낌으로 아이의 도전을 자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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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