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부모 사이2013/05/12 05:28



지금도 십여 년 전의 그 순간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밤이면 몇 번씩 깨어서 울던 아이그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며 재우던 순간이 생각납니다이렇게 잠을 못 자서야 과연 낮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고언제까지 아이를 안고 한밤중에 거실을 돌아야 하나 앞이 캄캄했죠설핏 잠든 아가의 얼굴은 한없이 사랑스럽지만 잠을 못 잔 저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내가 참 부족하구나.' 아이에게 부모의 표정이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지만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습니다처음에는 스스로를 탓하고 죄책감도 가져봤습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짜증은 더 커졌습니다죄책감은 오히려 아이를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아이를 키우느라 내 바닥을 본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 내 약점을 공격하던 친구에게 그랬듯 화가 나더군요.

 

화가 나고 답답해서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이를 노려보고 있다 보니 갑자기 '이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겠구나.' 싶었습니다자기도 답답한데 방법은 없고, 그냥 우는 것 말고는 이 조그만 생명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이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부모라는 이름표를 달고사회에서는 소아정신과 의사라고 불러주지만 자기 감정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약한 존재가 바로 ‘나’였습니다나도 아이도 그처럼 약한 존재, 부족한 존재였습니다.

 

눈물이 조금 났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습니다있는 그대로 아이의 수준을 인정하자또 내 수준도 인정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못난 부분이 있어도 괜찮다부족한 것을 인정하고그렇지만 더 잘해 보려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잘해 보려는 마음을 갖는 것도 버겁다면 조금 뒤로 미뤄도 괜찮다우선 나를 지켜야 더 오래 나와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원망합니다그런데 가만 보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 부족한 자신을 원망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지 않고 자신을 탓하느라 시간을 다 쓰고 있습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바로 ‘나’인데 원망해봐야 무엇 하겠습니까그런 나를 인정하고, 하나라도 더 내게 채워주려 하면 됩니다그런 부모의 모습이 아이에게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부모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스스로에게 잘 하려고 할 때 아이도 자기를 사랑하기에 더 발전하고 싶어 합니다.






첫 책이 나오고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부모들에게 늘 해오듯 꾸준히 이야기를 건넸습니다이제 그 이야기들이 또 한 권의 책으로 묶였군요첫 책이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와 철학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공부, 사춘기 등 더 큰 아이들을 키울 때의 고민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다시 책을 내기로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책의 형식이었습니다'좀 더 호흡이 긴 글로 묶어서 책을 낼까아니면 부모들이 쉽게 읽고, 한 번쯤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는 책을 낼까?' 비슷한 형식으로 책을 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번에도 제 선택은 같았습니다언제든 부담 없이 펴서 몇 장을 읽을 수 있는 책그러면서 아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 제가 바라는 책입니다그렇잖아도 버거운 육아에 책 읽는 부담까지 얹어주고 싶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전보다는 더 길게, 충분한 내용을 적으려 욕심을 냈고 그래서 책이 전보다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저는 이 책이 그저 부모들의 힘든 시간에 대한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거기서 더 나아가 아이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제겐 과분한 기쁨일 것입니다

 

 

2013 5

서천석



* '작가의 말'에 쓰지 못했는데,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준 박보미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책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박 작가의 역할이 무척 큽니다. 아울러 창비의 씩씩하고 섬세한 편집자 이하림 씨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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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






바야흐로 눈의 계절인 겨울이 왔다. 아이들에게 겨울에 생각나는 것을 물어보면 십중팔구 눈을 이야기한다. 눈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까? 심지어는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도, 눈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눈이 오면 금방 흥분을 한다. 여기에는 이유도 설명도 필요 없다. 아이들은 그냥 눈이 좋고, 만지고 싶고, 눈밭을 내달리길 원한다.

 

박보미의 첫 그림책인 ‘첫눈’은 눈에 대한 아이의 환상을 아름답게 옮겨내고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이는 눈을 맞는다. 사실 눈처럼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발 딛고 있는 현실, 펄쩍 뛰어 봤자 1초도 안 돼 땅에 발이 닿아야 하는 현실이 눈이 오는 순간만큼은 잠시 중력을 잃고 가벼워진다. 더러운 것도 가려져 보이지 않고, 복잡한 것도 하얀 눈 아래서는 단순해 보인다. 잠시지만 현실이 만만해지고 그 위에 뭐라도 그려낼 수 있을 듯한 설레임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그림책에서 아이는 아마도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고 아이는 옷을 입고 집밖으로 혼자 나간다.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보고 돌돌 뭉쳐도 보고 이내 굴려서 점점 큰 눈덩이를 만든다. 현실에선 한 뼘 자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눈은 뭉치고 굴리면 쉽게 커진다. 눈사람은 더 커지고 싶고, 더 자라고 싶은 아이의 소망을 반영한다. 아울러 나도 뭔가 그럴 듯하고 큰 걸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뻐기고 싶은 아이의 바람을 보여준다. 엄마, 아빠가 날 만들어냈다면 나도 이렇게 큰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아이는 말하고 싶다. 엄마, 아빠처럼 나도 능력이 있으니 무시하지 말라는 아이의 불안과 자존심의 표현이 눈사람이다. 





아이는 골목을 지나, 논밭을 지나고, 밤기차가 지나는 어두운 길을 눈덩이를 굴리며 하염없이 걸어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 숲속으로 자기 키 만큼이나 커진 눈덩이를 굴려가며 씩씩하게 나간다. 토끼와 사슴, 하얀 곰들은 말없이 아이를 지켜보고 강아지는 아이를 따른다. 그리고 도착한 너른 공터. 그곳엔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자기보다 큰 눈덩이와 함께 모여 있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 도와가며 눈사람을 만들다. 그리고 눈과 아이는 하나가 된다. 



이 그림책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하늘에서 눈과 눈사람,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내려오는 장면이다. 어쩌면 아이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자기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냈다는 자신감으로 부푼 아이들의 마음, 마음을 누르는 불안을 덜어낸 아이들의 마음은 더 없이 가볍다. 눈처럼 가벼워 저 하늘 위로 떠오를 듯만 싶다.



 



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은 가벼워지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다. 왜 그것도 못하냐는 말, 넌 아직 안 된다는 말에 눌리지 않고 싶다. 한번쯤은 뭐든 할 수 있고,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고, 어느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눈처럼 되고 싶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는 혀로 눈을 받아먹는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그랬을 장면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들에게 눈은 먹고 싶을 만큼, 그래서 하나가 되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 사랑의 결과는 부모에게 적지 않은 수고를 들게 하지만 그것조차 막는다면 아이는 또 어디서 그만큼 마음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이 글은 2012년 12월 15일 한겨레신문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에 실린 칼럼의 원본입니다. 이 칼럼에서는 신간 서적은 잘 다루지 않는데 '눈'에 대한 우리 그림책을 찾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에 반해서 골라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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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

그림책이 없던 시절 아이들에겐 어떤 것이 있었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릎팍에 누워 듣던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래동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래동화에는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주인공이 나온다. 괴물과 요정, 선녀와 도깨비. 주인공들이 벌이는 경이로운 이야기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 안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는 비유가 받아들이기에 덜 아프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서 다져진 상징들은 아이 마음 속 무의식을 더 깊게 움직인다.


전래동화가 가진 강한 이야기의 힘 덕분에 많은 동화는 그림책으로 그려지고 또 그려지고 있다. 구전 동화의 채록이 아닌 창작으로서의 동화라는 장르를 연 안데르센의 동화 역시 많은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가 직접 만들고 그린 동화 그림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는 다 동화겠지만 신비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야기로서의 동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직 토미 웅거러가 일당백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1998년 어린이책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그래서 당연한 귀결이다.




 

옛날 옛적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살았다. 거인이 제일 좋아하는 식사거리는 아이들이다. 거인에게 작고 부드러운 아이만큼 먹기 좋은 음식은 없다. 이쯤 되면 그림책을 듣는 아이들은 바짝 긴장한다. 그림책은 첫 장부터 가운데 피 묻은 칼이 나오고 아래엔 우리에 갇힌 아이의 팔을 보여준다. 잔혹 동화가 아닌가 걱정될 정도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만 읽어 달라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이란 대개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는 현실을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더 강해져 두려움을 이기고 싶어 한다.


거인은 마을을 돌며 아이들을 잡아간다. 아이들은 모두 통에 들어가고 궤짝에 숨고 땅을 파고 숨는다. 좁은 공간에 숨어드는 것은 두려움에 대응하는 아이들 특유의 행동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인은 현실에 없지만 아이들은 거인보다 더 무서운,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자주 시달린다. 자기로선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순응해 들어가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두려운 일이다. 어쩌면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불안도 이것을 의미할지 모른다.





제랄다는 숲에서 아버지와 같이 사는 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제랄다는 거인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제랄다는 용감하고 독립적이다. 아직 어리지만 혼자 수레를 끌고 장에 물건을 팔러 나갈 정도다. 어쩌면 아빠가 아프기에 그럴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믿고 기회를 줄 때만이 아이들은 강해진다. 정보를 많이 안다고 더 강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이 알지만, 아니 더 많이 알기에 정작 삶을 배울 기회를 잃고 말 수도 있다. 부모는 조심하라고, 미리 생각해보라고 더 많이 알려주지만 이는 아이를 두렵게 할 뿐, 아이가 삶을 사랑하도록 이끌지 못한다.





거인은 제랄다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린다. 하지만 오래 굶은 터라 실패하고 만다. 제랄다는 자기 앞에 뻗어버린 거인을 두고 가지 못한다. 배고픈 거인에게 장에 나가 팔려고 한 재료들을 이용해 맛난 음식을 만들어준다.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다. 거인은 제랄다의 음식에 흠뻑 빠져든다. 신선한 아이가 가장 맛난 음식인 줄 알았는데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가장 맛난 음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변화는 시작된다. 거인은 이제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는다. 아이들보다 더 맛난 제랄다의 요리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행복해진다.





이 동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은 편견이 없기에 진정 위기를 해결할 힘이 있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들이야말로 더 많은 편견을 갖고 있다. 두려움이 많은 아이들은 불안을 이기기 위해 선입견을 고집하고 금기에 더 많이 매달린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다. 무섭게 생긴 거인이 정말 그렇게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 번쩍이는 칼이 꼭 자신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자기와 비슷한 제랄다를 보며 아이들은 배워 간다. 세상은 무섭지만 그게 꼭 나를 향하는 것은 아냐. 내게 필요한 일은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는 것뿐이야. 토미 웅거러는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속삭인다. “걱정을 버리렴. 그리고 너다운 것을 해보렴. 그럼 모두가 널 사랑할 거야.”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거인과 제랄다를 아이들 내면의 두 가지 얼굴로 해석할 수도 있다. 힘세고 강하지만 폭력적이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거인. 작고 약하지만 남을 믿고 배려하는 제랄다. 아이들 내면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다. 아이들은 때론 거인의 시기를 살아가고, 때론 제랄다의 시기를 살아간다. 두 인물 모두 아이들이 소망하는 원형이다. 착한 제랄다를 바랄 때도 있지만 강한 거인을 바랄 때도 있다.


토미 웅거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랄다가 거인을 살렸어. 이제 거인은 힘이 세지만 무섭지는 않아. 강한 것이 꼭 무서운 것은 아니란다. 어른들이 네게 무섭게 대하고 마음대로 했을지 몰라. 하지만 넌 강하더라도 무섭지 않을 수 있단다. 그러기 위해선 제랄다가 필요해. 제랄다가 없으면 넌 계속 네 마음속의 순수한 아이들을 잡아먹어야 한단다. 그러면 아이들은 사라져. 너는 순수함을 다 잃고 그냥 무섭기만 한 어른이 될 거야.





토미 웅거러는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인과 제랄다를 결혼시킨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거인도 제랄다도 서로가 함께할 때 더 행복하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에게 사랑과 배려, 말 잘 듣는 모습만 기대한다. 하지만 한쪽 면만 가진 아이란 없는 법이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은 아이들의 다른 한쪽 면. 그 부분이 있기에 아이들은 아이답고 더 온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

 


이 글은 2012년 12월 1일 한겨레신문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칼럼의 원본입니다.


사족 


트위터에서 한 분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 중 한 명이 등 뒤에 포크와 칼을 숨기고 있는 이유를 물어보셨어요. 바로 그 부분이 토미 웅거러가 '거인'이 어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괴물이 아니라 아이 내면에 있는 여러 얼굴 중 하나임을 보여주는 증거지요. 이 아이는 갓 태어난 동생이 너무 미운 겁니다. 환영하는 형, 엄마 눈치를 보는 누나, 그리고 겉으론 공격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지만 마음에는 동생을 잡아먹고 싶을 정도인 형을 같이 그렸지요. 이 모두가 아이들이 가진 여러 얼굴이지요. 무섭고 잔인한 거인은 결국 아이 마음의 한 부분이고, 모든 아이가 보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림 속 저 아이가 보여주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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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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